스위스 정신과 의사인 칼 구스타프 융은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였다. 그는 1875년 취리히의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다. 그는 1895년에 바젤에서 의학공부를 시작했고 1900년에는 유진 블로일러가 원장으로 있는 취리히의 부르크휠츨리 정신과 병원에서 보조 의사가 되었다. 일찍부터 영성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1902년에 "소위 초자연적 현상의 심리학과 병리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학위 논문을 출간했다. 그 병원에서 융은 단어-연상을 토대로 한 심리검사를 개발했는데, 이 검사가 피검사자들에게 불러일으킨 이미지와 환상들의 집달을 가리키기 위해 "콤플렉스"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그는 또한 정신증 환자들에게도 이 검사를 사용하여, 1906년에 이제는 고전적 교재로 간주되는 [조발성 치매의 심리학]을 출간했다. 1907년 2월에 처음 만난 프로이트와 서신왕래를 시작한 것도 이때이다. 처음부터 프로이트에게는 그들의 관계가 상당히 중요했는데, 당시 가장 유명한 정신병원이었던 취리히의 블로일러 병원에 속한 융을 대변인으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취리히의 개신교 가정 출신인 융과 같은 인물의 존재는, 정신분석의 초종파적 측면을 부각시켜주었다. 융에 대해서 프로이트는 칼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의 등장으로 정신분석은 유대민족의 관심사가 될 수 있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우리의 아리아계 동료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알 될 사람이다." 융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던 프로이트는 때로 융을 "명백한 아들이며 후계자"라고 부르면서, 언젠가는 그가 자신의 뒤를 잇게 해달라고 부탁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마 앞서 몇 년간의 플리스에 대한 이상화를 일부 융에게 옮긴 것이었을 것이다. 1909년 클라크대학의 초대를 받은 프로이트는 융과 페렌치를 동반하고 미국을 방문했다. 바로 직후에 융은 국제정신분석학회(IPA)의 회장에 임명되었으며, [연감]의 편집장에 되었다. 같응ㄴ 해에 그는 취리히 인근의 쿠스나트에서 개인 진료를 시작하여 여생을 거기서 보낸다. 프로이트와 융의 갈등은 특히 1912년에 격렬해졌다. 의견 충돌의 핵심은 융이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도, 유아 성욕에 부여한 역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1913년에 [무의식의 심리학]을 출간한 직후, 융은영원히 정신분석 운동을 떠났으며 취리히 대학의 자릴에서 물러났다. 그러고는 붕괴가 일어나 한동안 불안과 환각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 후에 그는 그가 자서전에서 "무의식과의 대면"이라고 부른, 심층적인 자기-분석에 모든 시간을 바쳤다. 그가 정신적 삶을 이해하는 자신의 방식에 속하는 대부분의 개념들 - 집단 무의식, 원형, 개성화, 융 학파적 꿈의 해석 - 과 소위 "분석 심리학" 이라는 자신만의 치료 방법을 발달시킨 것은 이 시기였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노선을 따랐다. 프로이트를 벗어난 후 점차 그의 주변에 추종자들이 모여들었고, 그의 작업은 국제적으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21년에 출간한 [정신적 유형]에서, 그는 개성화라는 사고에 기초하여 심리 발달의 유형학적 분류를 정립했다. 그러나 다른 민족들의 심리학에 대한 그의 관점은 인종차별주의, 심지어 반유대주의적 이념을 채택했기 때문에, [독일나치당의] 국가사회주의 신조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다소 양가적이었다. 이차 세계대전 동안 그는 자신이 지은 볼링겐의 외딴 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으며, 정신치료를 하고 다양한 논문들을 쓰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의 연구는 연금술, 영성, 신비주의를 포함한 다양한 주제들을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그는 이러한 영역들을 개성화를 통한 마음의 발달에 대한 현상학적 이해와 연결시키려고 애썼다. 융은 1961년에 쿠스나트에서 사망했다. 현대에 있어 융 그리고 그의 사고의 역할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 것인가? 테일러에 따르면 20세기 역사가들은 무엇보다도 융을 프로이트의 조력자로 보고, 융의 이론이 정신분석적 주류 안에서 이견의 목소리를 냈다고 간주한다. 심층심리학의 역사에 대한 보다 최근의 연구는, 융이 프로이트에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인정되긴 하지만, 그가 19세기의 초월적 심리학과의 연속성 속에서 "상징적 가설"의 진정한 옹호자임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테일러는 이러한 영향이 현대 사회에서도 중요하게 지속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서방 국가들의 반체제적인 심리치료 문화 속에서, 융 학파 사고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는 것을, 이러한 보다 초기의 뿌리 덕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자격 있는 융 학파 분석가들은 계속해서 프로이트의 변형으로 그들의 혈통을 확인하고 있으며, 정신분석 영역에서 설 자리를 찾기 위한 노력을 증진시킴으로써, 실제 그들이 아직 자신들의 혈통을 주장하지 않았을 때에도, 심리학과 정신의학 문화의 보다 폭 넓은 주류 내에거 정당성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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